보도자료

전북가야 사적,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작성자 : 강석주 전화번호 : 063-469-8964 작성일 : 2019-08-30 조회수 : 1331

가야사 국정 과제 초대, 영호남 화합 목표

호남 최초 사적 지정, 세계유산 잠정 목록


 

1500년 전 가야 사람들은 백두대간을 넘나들며 끊임없이 교류했다. 영호남의 지역 구분 없이 하나의 생활권과 하나의 문화권을 만들었다. 가야 사람들의 삶의 혜안을 배우기 위해 가야사를 100대 국정과제에 초대했다. 가야사를 올곧게 복원하여 영호남의 화합을 이루겠다는 열망이 담겨있다. 전북도민들을 국정과제에 초대하기 위한 대중적이고 홍보적인 용어가 전북가야다.

 

흔히 신선의 땅으로 널리 회자되고 있는 운봉고원에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고분군이 있다. 솔개가 하늘을 나는 모습을 닮은 연비산에서 동서로 뻗은 산자락에 위치한다. 사방 어디에서 봐도 한눈에 쏙 들어오는 산줄기에 40여 기의 대형고분이 오밀조밀 모여 있다. 남원 인월면 유곡리와 아영면 두락리에 대형고분이 골고루 분포되어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라고 이름을 붙였다.

 

가야 왕이 누군지 알 수 없어 대형고분을 가야 고총이라고 부른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 가야 고총은 봉분의 직경이 30m 이상으로 마치 산봉우리를 연상시킨다. 소나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룰 정도로 관리의 손길이 미치지 않고 있지만 모든 가야의 고총 중 가장 크다. 가야 고총의 크기는 국력을 상징한다. 운봉고원에 기반은 둔 가야 왕국 기문국의 국력이 탁월했음을 뽐낸다.

 

1973년 한 차례의 발굴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전라북도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어 그 역사성을 인정받았다. 1989년과 2013년 두 차례의 발굴조사에서 큰 성과를 거두어 2018년 3월 28일 국가 사적 제542호로 승격됐다. 첫 삽을 뜨고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기까지 무려 30년의 세월이 필요했다. 우리들의 전북가야 인식의 현주소와 무관심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일제강점기 때 입은 도굴의 상처가 아물지 않았다. 당시 금관이 나왔다든지, 금으로 만든 주전자가 나왔다든지, 쇠로 만든 긴 칼이 나왔다는 도굴 이야기는 끝없이 이어진다. 일제강점기부터 도굴로 빠져나간 유물을 트럭으로 계산하면 10대 이상은 넘는다고 하니 한마디로 충격이다. 우리들이 나라를 지키지 못하면 유구한 역사가 통째로 사라진다는 아픔을 꼭 명심해야 한다.

 

더욱 안타까운 것은 가야 고총의 내부구조를 모두 다 알고 있다는 것이다. 30년 전 17호분이 발굴 대상으로 선택된 것은 매장공간이 무너졌다는 이야기를 들었기 때문이다. 당시 발굴이 진행되면서 발굴단의 희망은 낙담으로 변했다. 모두 네 차례의 도굴 피해를 입어 매장공간이 텅 비어있었기 때문이다. 큰 방이 있었다는 36호분은 백제계 돌방무덤으로 그 존재를 세상에 알렸다.

 

2013년 32호 가야 고총은 최고의 유물로 화답했다. 당시 두 가지 이유로 발굴 대상으로 선정됐는데, 하나는 봉분이 7번째 크기였고, 다른 하나는 봉분이 너무 심하게 훼손됐기 때문이다. 봉분이 너무 커 밭을 계단식으로 개간했는데 아무리 설명을 해도 무덤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의혹이 많아서였다. 무엇보다 유적 한 가운데 터를 잡았는데 그 모습이 중환자처럼 너무 심각했다.

 

가야 고총 최초로 금동신발과 청동거울이 나와 역사학계를 흥분시켰다. 금동신발은 백제왕이 기문국 왕에게 보내 최고의 위세품으로 국내교류에서 최고의 걸작품이다. 중국 남조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은 무령왕릉 출토품보다 30여 년 앞서는 것으로 국제교류의 백미이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는 당시 동북아 문물교류의 허브였음이 유적과 유물로 명약관화하게 증명했다.

 

흔히 가야사는 유적과 유물로 쓰는 역사라고 한다. ‘삼국사기’를 읽고 또 읽어도 가야를 만날 수 없다. 전북가야가 ‘삼국유사’에 초대를 받지 못한 이유는 백제에 일찍 복속됐기 때문이다. 전북가야의 유적과 유물은 달리 역사책과 같은 존재이다. 앞으로 전북가야사를 복원하려면 유적과 유물을 철통같이 잘 지켜야 한다. 그리고 전북에 전북가야가 있다는 사실을 꼭 기억했으면 한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는 최고의 자연경관을 자랑한다. 백두대간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휘감아 기문국의 도성 역할을 담당했다. 가야 고총이 자리한 산줄기를 왕성으로 인식하고 왕성 안쪽을 성내마을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그렇다면 성내마을 앞쪽 논에 기문국의 왕이 생활하던 왕궁 터가 자리하고 있을 것으로 추측된다. 그리고 지리산 일대를 왕궁의 정원으로 초대했다.

 

운봉고원은 그 중심지가 네 번 이동했다. 기원전 84년 마한 왕이 지리산 달궁계곡에서 달궁 터를 닦고 71년 동안 국력을 키워 운봉읍 장교리 연동마을로 이동해 말무덤을 남겼다. 그리고 4세기 말엽 경 가야문화를 받아들이고 아영면 월산리·청계리 일대에서 잠시 머물다가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로 정치 중심지를 옮겼다. 남원 유곡리와 두락리는 기문국의 마지막 도읍이었다.

 

출처 : 새전북신문(http://www.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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