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조선시대에 들어와 옥구현이 임피현의 속현으로부터 독립하여, 임피현과 함께 옥구현에도 지방관이 파견되기 시작하였다. 회미현은 옥구현에 편입되었다. 읍의 규모는 고려시대에 이어 여전히 임피현이 옥구현보다 컸다. 전라우도(全羅右道)에 속했으며, 인구는 18세기후반의 경우 대략 4만명 이상이 살았던 것으로 추정되는데, 다른 도시처럼 여자가 남자보다 많았다. 서울까지는 5일 내지 6일, 전주까지는 하루 거리였다.

군산 지역은 군사적 요충지로 태조 6년(1397) 옥구현에 진(鎭)이 설치되었으며, 첨절제사가 임용되어 인근 군현의 군사를 통괄하면서 옥구현의 통치를 담당하였다. 이후 군제가 진관체제로 개편되면서 1459년(세조 5) 옥구진이 혁파되고 현감이 임용되어 읍치를 담당하였다.

조선초에는 옥구현에 전라도 수영이 설치되기도 하였다. 조선말까지 지속된 진포 수덕산자락의 군산진(群山鎭)은 선유도의 고군산진이 옮겨온 것으로 옥구진이 혁파될 무렵 설치된 것으로 보인다. 만호(종4품)가 임용되다가 1710년(숙종 36) 첨절제사(종3품) 진으로 승격되었으며 군사와 조운을 관장하였다.

조선시대의 군산 (동여비고)
[조선시대의 군산 (동여비고)]

선유도에는 1675년(숙종 원년)경에 군산진과는 별도의 진이 다시 설치되었다. 군산 지역은 또한 조운의 요로로 군산창(群山倉)이 설치되었던 곳이다. 당시에는 육상교통에 많은 제한이 따라 세곡을 바닷길로 운송하였는데, 일찍부터 군산 지역은 조창(漕倉)이 설치되어 세곡운송의 거점이 되었다. 중종 7년에 설치된 군산창은 용안의 득성창(得成倉)이 옮겨 온 것으로, 조선초에는 노인성창(老人城倉)이 있었다. 군산창은 영광의 법성창(法聖倉)과 함께 전라도의 대표적인 조창으로 영·정조대의 경우 전주, 진안, 장수, 태인, 금구, 임실, 군산 등의 세곡을 관장하였다.

조선시대 군산의 역사는 조운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한편 조선시대에 군산을 빛낸 인물로 최호(崔湖)장군이 있다. 그는 조선 중기의 무신으로 1574년(선조 7) 무과에 급제하고 1594년에 함경도 병마절도사가 되었다. 충청도 수군절도사로 재임 중이던 1596년 이몽학의 난을 평정하였으며,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칠천량해전에서 분전하다가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순절하였다. 그의 호국정신을 추모하기 위해 1729년 개정면 발산리에 사당이 건립되었으며, 1990년부터는 해마다 음력 7월 16일에 추모제를 지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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