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전북가야 동북아 문물교류 허브
작성자 : 강석주 전화번호 : 063-469-8964 작성일 : 2019-07-29 조회수 : 1334

운봉가야 중국제 청자 계수호, 수대경 출토

장수가야 오색옥 및 곡옥, 문물교류의 허브


 

479년 가라왕 하지가 중국의 남제로부터 보국장군본국왕(輔國將軍本國王)에 책봉됐다. 565년 신라가 북제로부터 처음 책봉됐기 때문에 가야는 신라보다 86년이나 일찍 책봉을 받았다. 이때 가라왕을 대가야 왕으로 본 견해가 통용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가야에서는 당시 중국제 유물이 출토되지 않고 있지만, 전북가야에서는 중국제 청자인 계수호와 청동거울이 나왔다.

 

백두대간 시리봉 동쪽 기슭 말단부에 남원 월산리·청계리 고분군이 위치하고 있는데, 본래 20여 기의 가야 고총이 옹기종기 모여 있었다. 모두 두 차례의 발굴조사를 근거로 2018년 전라북도 기념물 제138호로 지정됐다. 2019년 국립나주문화재연구소 주관으로 서쪽을 반달모양으로 휘감은 산자락 정상부에 자리한 가야 고총을 대상으로 3차 학술발굴도 한창 진행 중이다.

 

2010년 계수호가 남원 월산리 M5호분에서 나왔다. 가야 고총이 밭 한 가운데 터를 잡았는데, 본래 봉분은 그 평면형태가 장타원형이었다. 봉분의 중앙에는 크고 작은 할석을 가지고 쌓은 매장공간이 배치됐는데, 매장공간은 그 길이가 960cm로 가야 고총 중 가장 크다. 본래 매장공간을 가지런히 덮은 뚜껑돌이 상당수 없어져 도굴의 피해를 입었지만 유물이 다량으로 쏟아졌다.

 

매장공간은 남북으로 길게 장축방향을 두었는데, 무덤 주인공의 시신을 모신 목관을 중앙에 배치하고 그 양쪽을 유물로 가득 채웠다. 계수호는 주인공의 머리 부분에 해당하는 북쪽에서 금제이식과 철제초두, 토기류와 함께 놓여있었다. 그리고 서쪽에서는 마구류와 무구류, 농공구류, 토기류 등이 출토됐는데, 운봉고원에서 만들어진 복발형 투구는 일본에서 더 많이 나왔다.

 

모든 가야 영역에서 한 점만 나온 계수호는 중국에서도 최상급 위세품으로 평가받는다. 본래 차를 담는 용기로 몸통에 달린 닭 머리가 입을 꽉 다물어 무덤에 넣기 위한 명기로 추정된다. 당시 중국과 문물교류의 상징물로 전북가야의 국제성을 대변해 준다. 남원 월산리 M5호분은 봉분의 크기와 매장공간의 규모, 계수호와 철제초두 등 최상급 부장유물을 근거로 볼 때 운봉가야가 국력을 쏟아 만들었다.

 

남원 월산리에서 동쪽으로 1.5km 떨어진 산자락에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이 있다. 2013년 남원 유곡리·두락리 32호분 주석곽에서 한 점의 청동거울이 출토되어 운봉가야의 국제성을 다시 뽐냈다. 2018년 3월에는 호남지방에서 최초로 가야 관련 국가 사적 제542호로 지정됐고, 당시의 여세를 몰아 가야고분군 세계유산 등재 목록에도 그 이름을 당당히 올렸다.

 

주석곽 무덤 주인공의 머리쪽에서 나온 청동거울은 직물로 싼 뒤 등 부분이 위로 향하도록 나무 상자에 넣었다. 등 부분 중앙에 배치된 원형 손잡이를 중심으로 의자손(宜子孫) 명문과 서수문(瑞獸文)이 표현되어 있는데, 의자손은 자손이 번성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이다. 그리고 7개의 작은 손잡이 사이에 동물 문양을 새겨 의자손 수대경(獸帶鏡)이라고 부른다.

 

우리나라에서 의자손수대경은 무령왕릉 출토품이 유일하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로 일본에서는 오키노시마(沖ノ島)와 사사하라(笹原),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 나왔는데, 거울의 특징이 서로 비슷하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내 가야 고총에서 의자손수대경이 출토됨으로써 당시 운봉고원의 기문국이 동북아 문물교류의 허브였음이 유물로 입증됐다.

 

우리나라에서 의자손수대경은 무령왕릉 출토품이 유일하다. 중국에서 만들어진 청동거울로 일본에서는 오키노시마(沖ノ島)와 사사하라(笹原), 에다후나야마(江田船山) 고분에서 나왔는데, 거울의 특징이 서로 비슷하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 내 가야 고총에서 의자손수대경이 출토됨으로써 당시 운봉고원의 기문국이 동북아 문물교류의 허브였음이 유물로 입증됐다.

 

2018년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 고분군에서 동남아에서 만들어진 오색옥(五色玉)이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 백두대간 산줄기 서쪽에도 가야 왕국이 존재한다는 고고학적 단초를 처음 학계에 제공했던 곳이다. 장수군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장수가야의 백성들이 잠든 사후세계의 안식처이다. 무덤은 또한 망자의 새로운 쉼터이자 보금자리다.

 

장수가야는 국내외 물물교류의 메카였다.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마한과 백제, 가야, 신라토기가 한 분묘유적에서 함께 출토되어 학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다. 장수 삼고리 3호분에서 나온 오색옥은 인도네시아 레독옴보에서 제작된 것으로 나주 정촌에서 나온 삼색옥이 더 있을 뿐이다. 장수가야가 철의 생산과 유통으로 당시 융성했음을 명약관하하게 유물로 보여줬다.

 

전북가야는 동북아 문물교류의 허브였다. 운봉고원의 지배자부터 장수가야의 백성에 이르기까지 문물교류의 역동성과 국제성을 일목요연하게 보여줬다. 중국제 계수호와 의자손 수대경, 동남아에서 바닷길로 전해진 오색옥도 전북가야의 분묘유적에서만 나왔다. 중국을 출발해 우리나라를 거쳐 일본까지 이어진 동북아 교역로의 교량역할을 전북가야가 담당했던 것 같다.

 

출처 : 새전북신문(http://www.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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