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메아리] 전북가야의 보물 금동신발
작성자 : 강석주 전화번호 : 063-469-8964 작성일 : 2019-06-03 조회수 : 1173

“2013년, 남원 유곡리·두락리 32호분 출토

가야 고총 최초, 유물로는 백제왕과 대등”


조선시대 예언서 ‘정감록’에 사람이 살기 좋은 십승지지에 운봉고원이 당당히 이름을 올렸다. 달리 신선의 땅으로 불리는 곳으로 백두대간 산줄기가 사방을 병풍처럼 휘감고 있다. 운봉고원 동북쪽에 아영분지가 있는데, 김부식이 편찬한 ‘삼국사기’에 아영성(阿英城)이 등장한다. 1500년 동안 운봉고원을 무대로 흥망성쇠를 꼼꼼히 기록한 역사책과 같은 지명이 아영이다.

 

백두대간 봉화산에서 한 갈래의 산줄기가 남쪽으로 위풍당당하게 이어지면서 전북과 경남의 경계를 이룬다. 산의 모습이 마치 솔개가 날아가는 형상을 닮은 연비산에서 한 갈래의 산자락이 서쪽으로 아영분지 한 복판까지 뻗어 내렸다. 어디에서 봐도 한눈에 산자락이 쏙 들어와 가야 사람들이 왕의 무덤을 조성하는데 제일 좋아하던 최고의 명당이다.

 

남원시 인월면 유곡리와 아영면 두락리 행정 경계를 이룬 산자락에 크고 작은 산봉우리들이 무리지어 있다. 현재 소나무가 무성하게 숲을 이루고 있어 언뜻 보면 산봉우리로 보이겠지만 모두 가야 왕릉이다. 연비산에서 서쪽으로 쭉 뻗은 산자락 정상부를 중심으로 남쪽 유곡리와 북쪽 두락리에 골고루 분포되어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이라고 이름을 붙였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고분군처럼 가야 고총이 사방에서 한 눈에 보이는 산줄기 정상부에 터를 잡은 것은 왕릉의 봉분을 산봉우리처럼 더욱 크게 보이게 함으로써 무덤 주인공의 신분이나 권위를 극대화하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담겨있다. 고구려와 신라의 왕릉이 구릉지와 평지에 백제가 산봉우리 남쪽 기슭에 왕릉을 조성한 것과 확연히 다르다. 아마도 삼국과 구별되는 가야만의 독자적인 장례문화와 장례풍습을 가지고 있었음을 말해주는 고고학적 증거이다. 남원 유곡리·두락리에는 산자락 정상부에 봉분의 직경이 30m 이상 되는 10여 기의 초대형급 가야 고총도 분포되어 운봉가야의 역동성과 그 위상을 잘 보여준다. 본래 봉분의 크기만을 기준으로 평가한다면 모든 가야의 영역에서 최대 규모를 자랑한다.

 

2013년 남원시에서 발굴비를 지원해 주어 전북대학교 박물관 주관으로 학술발굴이 이뤄졌다. 당시 산자락 정상부에 자리한 유곡리·두락리 32호분이 선정됐는데, 봉분은 그 직경이 일곱 번째 크기였다. 봉분의 정상부를 평탄하게 다듬고 밭을 계단식으로 만들 정도로 대단히 크다. 전북 동부지역에서 그 존재를 드러낸 420여 기의 가야 고총 중 유일하게 정비 복원됐다.

 

봉분에서 상당량의 말뼈가 수습되어 발굴단을 흥분시켰다. 운봉가야 사람들이 왕릉을 만들면서 정성스럽게 제사를 모시고 봉분에 넣은 둔 것으로 가야 고총에서 처음으로 나왔다. 마한 사람들이 장례를 치룰 때 말뼈를 사용했다는 문헌의 내용을 유물로 증명해 줬다. 운봉가야와 장수가야 등 전북가야의 묘제가 마한에서 비롯됐음을 다시 또 확인시켜 줬다.

 

봉분의 중앙에 배치된 주석곽과 그 북쪽에서 부장곽이 모습을 드러냈다. 주석곽은 무덤 주인공의 시신을 모신 매장공간으로 벽석이 무너진 것을 제외하면 그 보존상태가 양호했다. 부장곽은 유물을 보관하던 부속시설로 서쪽이 도굴의 피해를 입었다. 토기류와 철기류, 장신구류 등 거의 모든 가야 유물이 함께 쏟아졌는데, 최고의 걸작품은 역시 금동신발[金銅飾履]이다.

 

남원 유곡리·두락리 32호분 주석곽의 서쪽에 부장된 금동신발은 피장자의 발 부근에서 금동신발편·영락·영락고리·금동못 등이 나왔다. 신발의 몸통에 두드려 낸 마름모무늬와 얇은 쇠붙이 장식이 공주 무령왕릉과 익산 입점리 1호분, 나주 신촌리 9호분 출토품과 속성이 거의 상통한다. 백제왕이 운봉가야 왕에게 보낸 최고의 위세품(威勢品)으로 당시 백제와 운봉가야의 정략적 관계를 말해준다.

 

삼국시대 때 금동신발이 나온 무덤은 대부분 왕릉이나 백제 왕후제와 관련하여 최고의 권력자 혹은 지방 거점세력의 수장층 무덤으로 비정됐다. 모든 가야 고총에서 유일하게 나온 금동신발은 운봉가야의 존재를 고고학적으로 뚜렷하게 뒷받침해 줬다. 1500년 전 백제가 철의 왕국 운봉가야를 얼마나 중시했던가를 백제왕이 보낸 금동신발이 유물로 반증해 준 것이다.

 

2013년 남원 유곡리·두락리 32호분에서 나온 금동신발은 백제왕이 철 산지이자 문물교류의 관문으로 당시에 번영을 누린 운봉가야의 왕에게 보낸 권력의 상징물이다. 동시에 당시 철의 생산과 유통이 담긴 물물교환의 증거물이다. 백두대간 속 운봉고원에 지역적인 기반을 두고 가야 소국으로까지 발전했던 철의 왕국 운봉가야는 문헌에 자주 등장하는 기문국(己汶國)이다. 

 

출처 : 새전북신문(http://www.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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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최종수정일 : 2018-04-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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