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전북가야 토기박물관을 만들다
작성자 : 강석주 전화번호 : 063-469-8964 작성일 : 2019-07-10 조회수 : 1358

“전북가야 다양성, 마한·백제·신라·고구려 토기 출토

삼국시대 교역 물물교환, 철의 생산과 유통 증거물”

토기는 진흙으로 만들어 구운 그릇이다. 가야는 지역별로 독특한 모양과 특징을 담은 토기가 가야사 연구의 핵심을 이룬다. 가야토기는 금관가야와 대가야, 소가야, 아라가야, 창녕 양식 등이 가장 대표적이다.

전북가야는 지역성을 강하게 담은 가야토기 양식이 없지만 모든 양식의 토기가 공존한다. 한마디로 ‘가야토기 박물관’으로 어떤 역사적인 의미가 담겨있을까?

전북 동부지역에서 가장 이른 시기의 가야토기가 나온 곳이 장수 노하리 고분군이다. 2016년 장수읍 서쪽 봉황산에서 노하리 왕대마을까지 뻗어 내린 산자락 정상부에서 4세기 후엽 늦은 시기 가야토기가 다량으로 나왔다. 수혈식 석곽묘에서 나온 토기류는 아라가야와 대가야 양식, 백제토기가 함께 섞여있었는데, 토기류의 조합상은 다양성과 역동성으로 상징된다.

 

만경강유역에서 최대 규모의 마한계 분묘유적으로 밝혀진 완주 상운리 출토품과 흡사한 토기류도 섞여있었다. 당시부터 장수가야가 여러 가야 소국들과 백제, 마한과의 긴밀한 교류관계가 시작됐음을 유추해 볼 수 있다. 아마도 장수 노하리 부근에 위치한 장수 남양리에서 초기철기시대 처음 시작된 철 생산이 장수가야에 이르러 더 왕성하게 이뤄졌음을 알 수 있다.

지난해 장수군 천천면 삼고리에서도 장수가야의 정체성이 다시 또 입증됐다. 장수가야의 하위계층 분묘유적으로 봉분 위쪽에 주구를 두르고 반지하식 혹은 지상식 매장공간으로 이루어진 5기의 봉토분이 조사됐다. 봉토분은 토광묘와 수혈식 석곽묘로 구성된 매장공간의 바닥면 높이가 대부분 달라 추가장에 의한 다곽식으로 밝혀졌다.유물은 위신재로 알려진 금제이식과 오각형 철제대도를 중심으로 다양한 양식의 토기류가 나왔다. 토기류는 가야·백제·신라토기와 영산강유역의 유공광구소호도 섞여있었는데, 토기류의 조합상은 ‘토기박물관’을 방불케했다.

여기에 다섯 가지 색깔의 구슬은 가야 영역에서 처음 나왔다. 가야의 수장층 무덤에서 나왔던 유물이 하위계층 무덤에서 출토되어 비상한 관심을 끌었다.1996년 진안 용담댐 수몰지구 내 진안 황산리 고분군도 전북가야의 위상을 한껏 높였다. 백제토성으로 밝혀진 진안 와정토성에서 서쪽으로 350m 가량 떨어진 진안군 용담면 월계리에 위치한다. 가야의 수혈식 석곽묘에서 나온 토기류의 조합상은 다양한 가야토기가 유물의 절대량을 차지하고 있으면서 여기에 백제토기와 신라토기, 고구려토기도 섞여있었다.

 

1972년 임실읍 금성리 화성마을 동남쪽 산에서 나무를 심는 사방공사를 실시하는 과정에 3기의 고분이 우연히 발견됐다. 당시에 유구가 심하게 훼손되어 고분의 구조를 상세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일단 가야계 석곽묘로 추정된다. 모두 5점의 토기류는 한 점의 가야토기를 제외하면 모두 백제토기였다. 섬진강유역의 강한 지역성으로 가야토기와 백제토기가 반절씩 섞여있다.

 

지난해 백두대간 서쪽 무주군 일대로 신라의 진출이 유적과 유물로 밝혀졌다. 백제 웅진기 동안 사신들이 오갔던 옛길이 금강을 건넜던 무주읍 용포리 부근에 무주 대차리 고분군이 있다. 유물은 6세기를 전후한 시기의 신라토기가 절대량을 차지하고 일부 가야토기가 섞여있었다. 금강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위치한 무주군 무주읍으로 신라의 서진(西進)을 유물로 방증해 줬다.

 

백제와 가야, 신라를 연결해 주던 여러 갈래의 교역망이 그물조직처럼 잘 갖춰진 곳이 전북 동부지역이였다. 가야의 석곽묘에서 나온 가야토기는 금관가야와 대가야 등 대부분 가야 양식 토기를 포함한다. 여기에 백제토기와 신라토기, 고구려토기가 함께 부장된 곳은, 우리나라에서 진안고원이 유일하다. 진안고원의 철산지를 장악하려는 당시의 국가전략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전북 동부지역에서 백제계 토기는 4세기 말엽 경 처음 등장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가야토기도 4세기 말엽 늦은 시기부터 수혈식 석곽묘에 부장된다. 백제의 진출 이후 마한의 토착세력집단이 가야문화를 받아들여 전북가야가 가야 왕국으로까지 발전했다. 그렇게 본다면 전북가야는 150년에서 200년 동안 철산개발로 철의 왕국으로 융성하다가 백제에 복속된 것 같다.

 

전북은 염철론(鹽鐵論)의 큰 무대로 달리 동철서염(東鐵西鹽)으로 회자되고 있는데, 전북 동부지역에서 학계에 보고된 제철유적이 250여 개소에 달한다. 우리나라에서 최대 규모의 철산지로 다양성과 역동성으로 상징된다.전북 동부지역에서 생산된 철을 확보하고 공급하기 위해 최상급 토기를 가지고 철산지 전북가야를 방문했던 것 같다. 한마디로 토기는 물물교환의 증거물이다.

현재 게시물의 이전글과 다음글로 이동할 수 있는 링크를 보여주는 표입니다.
이전글 진안 성수면 ‘도통리 청자 가마터’, 국가 사적 지정 예고2019-06-24
다음글 장수 삼봉리 산성, 가야산성(봉수) 흔적발견2019-07-15

공공누리KOGL 공공저작물 자유이용허락

  • 공공저작물 자유이용 허락
국립군산대학교 에서 제작한 "보도자료" 저작물은 "공공누리 " 공공저작물 자유이용 허락표시 적용 안함 조건에 따라 이용 할 수 있습니다.
  • 담당부서 : 가야문화연구소
  • 담당자 : 박흥수
  • 연락처 : 063-469-8963
  • 최종수정일 : 2018-04-27
국립군산대학교 보도자료 이동 QR코드
페이지만족도평가
이 페이지에서 제공하는 정보에 만족하십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