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도자료

[메아리] 무주 덕유산 대규모 제철단지였다
작성자 : 김은희 전화번호 : 0634698964 작성일 : 2018-08-29 조회수 : 1892

 

″덕유산 일대 30여 개소 제철유적과 많은 암자
가야와 백제, 신라 삼국 최대 격전지와 나제통문″

 
 
  덕유산은 옛부터 ‘덕이 많아 넉넉한 산 혹은 너그러운 산’으로 불린다. 과연 그 잠재력은 어디서 나왔을까? 백두대간 백암봉에서 중봉 지나 북쪽으로 1.6km 가량 떨어진 곳에 위치한다. 최고봉 향적봉에 오르면, 북으로 적상산을 아래에 두고 멀리 황악산과 계룡산, 서쪽으로 운장산과 대둔산, 남쪽으로 지리산, 동쪽으로 가야산이 보인다. 나제통문에서 백련사까지 33경으로 유명한 최고의 절경지로 1975년 오대산과 함께 10번째 국립공원으로 지정됐다.

  덕유산 동쪽 구천동은 그 지명의 유래에서 두 가지 이야기가 전해진다. 하나는 옛날 덕유산에서 9천여 명의 성불공자(成佛功者)가 살았다 하여 ‘구천동’이라고 불렀고, 다른 하나는 ‘구씨(具氏)’와 ‘천씨(千氏)’가 살며 집안싸움을 하는 것을 어사 박문수가 해결하여 ‘구천동(具千洞)’이라 불리다가 지금의 ‘구천동(九千洞)’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어느 이야기와 더 깊은 관련이 있는가를 단언할 수 없지만 덕유산 일대에 절이 많았던 것은 사실이다.

  통일신라 신문왕 때 백련선사가 초암을 짓고 수도하던 중 흰 연꽃이 피어나 토굴을 처음 지었다고 한다. 고려 때는 14개의 암자를 거느렸고, 조선 중기에는 부휴, 정관, 벽암, 매월당 등 명승들이 벽련사를 거쳐 갔다고 한다. 백련사는 1960년대 본래의 절터에서 얼마간 떨어진 지금의 자리에 중창됐다. 아직까지 덕유산의 절터를 찾는 한 차례의 지표조사도 이루어지지 않아 다른 절터는 대부분 베일 속에 가려져 있다.

  현재 군산대학교 가야문화연구소 주관으로 덕유산 일대 제철유적을 찾고 알리는 지표조사가 한창 진행 중이다. 덕유산 일대에서 제철유적이 그 존재를 드러냈는데, 지금까지 발견된 제철유적은 그 수가 20여 개소에 달한다. 백두대간 달암재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여 줄곧 서북쪽으로 흐르는 얼음령계곡과 덕유산 동쪽 구천동계곡에 제철유적이 무리지어 있다. 한마디로 구천동계곡과 얼음령계곡은 대규모 제철단지이다.

  고려 때 14개의 암자를 거느리고 9천여 명의 불자들이 살아 갈 수 있었던 힘은 과연 어디에서 나왔을까? 다시 말해 절 혹은 승려에게 돈이나 음식을 보시하는 시주의 본바탕은 무엇이었을까? 최근에 덕유산 일대에서 그 존재를 드러내기 시작한 제철유적이 시주의 근원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흔히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제철유적은 경제의 백미이자 국력의 원천으로 고고학에서 최고의 유적으로 평가받는다.

  덕유산 향적봉 동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구천동계곡은 백연사 부근에서 그 방향을 북쪽으로 틀어 계속해서 북쪽으로 흐른다. 백련사 위쪽은 달리 재자골로 불리는데, 현지조사 때 재자골과 구천동계곡에서 많은 제철유적이 발견됐다. 구천동계곡에서 비교적 넓은 평탄대지에 제철유적이 입지를 두었는데, 그 주변에는 철광석을 채광하던 채석장이 위치한다. 그리고 용광로를 만드는데 필요한 양질의 흙을 품은 산죽도 군락지를 이룬다.

  백두대간의 달암재 서북쪽 얼음령계곡에도 1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무리지어 있다. 무주군과 거창군을 이어주던 옛길이 통과하던 달암재의 달(達)자에는 제철유적을 암시하는 뜻이 숨어있다. 달암재 북쪽 기슭에서 시작해 얼음령계곡을 따라 서북쪽으로 흘러온 물줄기는 신대휴게소 부근에서 구천동계곡으로 들어간다. 얼음령계곡 양쪽 평탄대지에 제철유적이 밀집 분포되어 있는데, 전북 동부지역에서 그 밀집도가 가장 높다.

  무주군 무풍면 삼거리 일대에서도 제철유적이 상당수 발견됐다. 백두대간의 빼재 북쪽 기슭에서 발원하는 모도막골과 여러 갈래의 골짜기마다 제철유적이 자리한다. 그런가 하면 덕유산 서쪽 덕산계곡에서도 많은 제철유적이 발견되어 커다란 관심을 모았다. 덕유산 향적봉을 중심으로 사방에 20여 개소의 제철유적이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한마디로 덕유산은 지붕 없는 제철유적 박물관이다.

  무주군은 가야와 백제, 신라의 유적과 유물이 공존한다. 고구려 장수왕의 남하정책으로 한성을 상실하고 공주로 도읍을 옮긴 백제가 갑자기 정치적인 불안에 빠지자 가야계 소국 반파와 신라가 무주군 일대로 진출한다. ‘일본서기’에는 반파와 신라가 서로 적대적인 관계를 보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무주군 제철유적을 차지하기 위한 철의 전쟁으로 추정된다. 그러다가 반파가 백제에 복속된 이후 백제와 신라의 국경이 나제통문에서 형성됐다.

  무주군 설천면 소천리에 자리한 나제통문은 일제강점기 석모산 남쪽 암벽을 뚫은 석굴이다. 백제와 신라의 국경을 이루었다고 전해지며, 지금도 양쪽의 언어와 풍습이 다르다. 나제통문을 중심으로 서쪽은 백제의 적천현(赤川縣), 동쪽은 신라의 무산현(茂山縣)이었는데, 조선시대에 이르러 양쪽 지역을 합쳐서 무주현(茂朱縣)이라 했다. 백제와 신라의 사신들이 64년 동안 오갔던 웅진기 사행로(使行路)도 나제통문을 통과했다.

  무주읍은 백제 적천현으로 통일신라 때 단천현(丹川縣)이라 하다가 고려시대 주계현(朱溪縣)으로 그 이름을 고쳤다. 우리말로 ‘쇠물’이라는 의미가 담긴 지명을 1500년 동안 지켜왔다. 덕유산, 향적봉, 달암재 등 최고의 지명들은 철광석을 녹여 철을 생산하던 제철유적이 탄생시킨 것으로 추측된다. 덕유산 속 14개 사찰에서 9천 여 명의 불자들이 신앙생활을 수행하는데 필요한 시주의 근원은 철 생산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덕유산 일대 제철유적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발굴조사가 추진되길 간절히 기원해 본다.

출처 : 새전북신문(http://www.sjb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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