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사』에 의하면 군산이라는 지명은 고려 후기에 와서 비로소 등장한다. 그것도 처음에는 군산도(群山島)라는 이름으로 나타나는 것으로 보아 오늘날의 군산 지역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고군산(古群山) 지역을 가리키는 지명으로 먼저 사용되었음이 분명하다. 이 지역을 가리키는 명칭으로서 군산이 등장하는 것은 이보다 훨씬 뒤인 조선시대의 일이다.
고려시대에 군산의 중심이 되었던 곳은 오히려 임피현이었다. 임피현은 비록 고려 초에 현(縣)으로 강등된 처지였지만, 군(郡)으로 있었던 신라 때에 이어서 옥구현(沃溝縣)과 회미현(澮尾縣)을 그 속현(屬縣)으로 하여 관할하고 있었을 뿐 아니라, 부윤현(富潤縣)과 만경현(萬頃縣)까지도 관할하고 있었다.
당시 속현에는 수령이 파견되지 않았기 때문에 영현(領縣)인 임피의 현령이 옥구현과 회미현 등을 함께 다스려 나갔다. 여기에서 임피현은 물론 오늘의 군산시 임피면에 해당하며, 옥구현은 군산시 옥구읍 일대, 그리고 회미현은 군산시 회현면에 각각 해당한다. 그리고 부윤현과 만경현은 오늘의 김제시 만경읍 지역에 해당하는 곳이다. 요컨대 오늘날과는 달리 당시 임피현은 옥구현과 회미현의 상위 행정 구역으로서 이 지역의 중심지였던 것이다. 이같은 임피 중심의 행정 체제는 고려 말까지 거의 변함없이 지속되었다.
[진포로 추정되는 금강하구둑 일원]
임피는 또 조창(漕倉)이 설치된 서해안의 요충지였다. 고려 정부는 농민들로부터 거두어들인 조세를 수도 개성으로 운반하는 조운(漕運)을 원활하게 하기 위하여 남도의 해안과 강가에 모두 12개의 조창을 설치하였는데, 그 중의 하나가 바로 임피의 조종포(朝宗浦)에 설치된 진성창(鎭成倉)이었다. 조창은 곧 고려말 극심했던 왜구의 약탈 대상이 되었다. 진성창 또한 예외가 아니어서 공민왕대에는 왜구의 잦은 약탈을 피하여 내지 깊숙한 곳으로 옮겨지기도 하였다.
1380년(우왕 8년) 5백척의 대선단을 이끌고 이곳 진포 지역에 쳐들어 온 왜적을 대파한 진포해전(鎭浦海戰)에서의 승리는 이같은 왜구의 노략질에 치명타를 가한 것이었다. 이 싸움은 최무선(崔茂宣)이 만든 화포를 처음으로 사용하여 왜구를 격멸하였다는 점에서도 전사상 매우 큰 의미를 지닌 것이었다.